Wednesday, April 25, 2012

<꿈>(1955, 신상옥) 수집기

씨네21

지난 2009년 여름의 끄트머리에 한 통의 짧은 이메일을 받았다. “신상옥 감독의 <꿈> 네가 필름과 <처와 애인> 필름이 있는데 혹시 구입 의사가 있나요?” 두 편의 영화 모두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필름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를 하려고 하니 웬걸, 받은 이메일에 연락처가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필름을 구입하는 절차가 있으니 전화를 달라는 답신을 보내고는 며칠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꿈>은 이광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승려 조신과 달례의 사랑의 도피, 그리고 맞게 되는 파국이 한낮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상옥 감독 자신이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예술성을 추구한 작품”이었으며, “우리가(신상옥-최은희 커플)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고 만드는 첫 영화였기 때문에 더욱 열성을 다했던 작품”이라고 말했을 만큼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신상옥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데뷔작인 <악야>(1952), <코리아>(1954)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지만, 이들 필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 <꿈>이 발굴된다면 신상옥 감독의 가장 오랜 영화가 될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영화 필름은 상업적 가치가 없어지면 방치되거나 버려졌고, 운 좋게 보관되었더라도 상온에 오래 보존할 수 없는 필름 자체의 특성 때문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수십 년 전의 필름이 온전히 보존되긴 어렵기 때문에 사실 국내에서 초창기 필름을 발굴한다는 기대는 그리 높지 않다. 참고로 1950년대에는 약 3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지만 그중 현존하는 영화는 고작 50편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50~60년 전의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은 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더구나 신상옥 감독의 초기 영화라니…… 기대감에 밤잠을 설치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며칠 뒤 소장자로부터 연락이 왔고, 부랴부랴 필름을 확인하기 위해 종로 숭인동 풍물시장에 위치한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은 온갖 잡동사니(?)가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었는데, 소장자는 다름 아니라 초창기의 각종 근현대자료를 구입해서 다시 판매하는 수집상이었다.
업무상 수집상들을 이따금씩 만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두 가지 점에서 놀라게 된다. 첫 번째는 그들의 소장 자료에 대한 지식이다. 각종 참고 도서와 카탈로그를 통해 대부분이 수집자료의 역사적 혹은 예술적 가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분야에서만 해도 초창기의 감독과 배우 정도는 술술 꿰고 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되팔 때 부르는 예상을 뛰어넘는 가격이다.
수집상을 만나 간단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영상자료원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각종 궁금한 사항들을 쏟아놓았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을 했는지, 수집한 물건 중에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필름들은 어디서 수집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질문 속에는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신뢰를 쌓아 향후에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를 담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육안으로는 필름들의 내용과 상태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집상에게 양해를 구하고 박스 채 한국영상자료원으로 가지고 왔다. 담당 직원이 일주일간 꼼꼼히 살펴본 뒤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것들은 완전판으로서 <꿈>(1955, 신상옥) 16mm 네거티브 필름 2권과 영화의 일부가 소실된 불완전판으로서 <옥단춘>(1956, 권영순), <처와 애인>(1957, 김성민), <쾌걸 흑두건>(1962), <들국화>(1965, 강찬우), <흑룡강>(1965, 이만희)의 필름들로 확인되었다. 이들 필름 모두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지 않은 영화들이었다.
다행히도 <꿈>의 16mm 네거티브 필름의 상태는 한 개인이 오랫동안 보관해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이제 필름이 확인되었으니 수집상으로부터 구입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몇몇 자문위원들과 상의하여 적정한 보상 금액을 정했고, 수집상에게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컬랙션이 소장자들의 선의에 의한 “기증”으로 구축되었다는 점과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예산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수집상의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줄다리기가 되었지만, 몇 번의 왕래와 장시간의 대화가 마음의 문을 열었고 결국에는 서로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합의를 이루어냈다.
필름 수집이 완료된 뒤, 최은희씨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그녀는 촬영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중간 중간 신상옥 감독에 대한 그리움에 간혹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최은희씨는 그의 자서전에서 <꿈>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꿈>은 신상옥 감독이 참 좋아하는 작품이어서 나중에 신영균ㆍ김혜정 주연의 천연색 영화로 직접 리바이벌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둘이서 함께 찍은 이 작품은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그 필름은 밀짚모자 테두리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는 지난 2005년 대만 필름 아카이브(Chinese Taipei Film Archive)에서 <열녀문>(1962)을 발굴한 이후로 그녀에게 두 번째 큰 선물을 가져다준 셈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꿈>의 발굴 성과가 이후 ‘문예영화’ 혹은 ‘사극’의 키워드로 연결되는 신상옥 감독의 초기 영화세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한국영상자료원 수집팀장 김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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